살수대첩의 배경
612년 두 번째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이 시작된다. 수군은 113만 명이라는 말이 되지 않는 병력으로 요하라는 땅에 도달했다. 그 수는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게 많은 수의 병력이다. 만약 그때 당시 고구려 병사들이 수나라의 병력을 알고 있었다면 탈영이 많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113만 명의 숫자의 병력이면 진군 속도가 늦어야 정상인데 수나라 병사들은 진군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하지만 고구려군도 쉽게 진격을 내주지 않았고 요하까지 가는데 엄청나게 저항하며 막아냈기 때문에 수나라는 2개월이나 걸렸다. 이 당시 수나라는 큰 고민에 빠졌다. 113만 명이라는 숫자는 역사상 유래 없는 숫자였기에 병력과 물자를 관리한다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 숫자는 시간과 비례해보면 정말 큰 위협이었다. 113만 명의 식량을 모두 먹이려면 엄청난 식량이 필요한데 시간이 지체되면 빠른 속도로 식량이 바닥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2개월의 시간이 흐른 수나라는 정말 큰일 난 상황이었다. 그래서 수나라의 왕인 수양제는 지금 상황을 모몀할 계책을 하나 세우는데 그건 바로 정예병의 진격이다. 그는 30만 명의 별동대를 만들어 단숨에 평양성으로 직행 및 함락시킬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당시 믿을만한 장군인 우중문과 우문술을 지휘관으로 앞세워 고구려를 멸망시키려 했다.
살수대첩의 전개
하지만 30만명도 적은 숫자가 아니었기에 보급에 큰 문제가 있었다. 이때 당시 수나라군의 군장 무게는 지금은 상상도 못 할 무게였다. 바로 50kg 정도 됐는데 병사들이 이걸 짊어지고 계속 움직인다는 건 미친 짓이었다. 그래서 병사들은 이동하면서 보급품을 몰래 버려버리는 일까지 발생한다. 이런 버려버린 보급품이 물자 부족을 만들게 되었고 최악의 상황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을지문덕을 적을 염탐하기 위해 항복을 구실로 수나라 적진에 들어오는데 그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함이었다. 적군의 상태는 자신의 생각대로 지치고 힘들어했고 을지문덕은 자신의 계획을 실행시키기에 결심한다. 여기서 우문술은 좋은 판단을 하였는데 물자가 부족하니 일단 퇴각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중문은 그의 얘기를 듣지 않았다. 그때 우중문이 우문 술의 얘기를 들었다면 고구려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는 지 궁금하다. 우중문과 을지문덕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얘기를 나눈다. 어찌 보면 을지문덕이 조롱을 하는 쪽에 더욱 가까웠다. 우중문은 계속되는 병사들의 사기 저하와 물자 부족으로 인해 결국 후퇴를 한다. 하지만 고구려군은 이제 시작이었다. 후퇴를 하는 수나라를 보자 고구려군은 퇴각하는 수나라를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그리고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수나라가 후퇴를 하면서 살수를 건너는 일이다. 이때 고구려군은 때를 놓치지 않고 모든 병력을 집중시켜 수나라군을 공격한다. 수나라는 청천강의 살수 안에서 학살이란 말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공격당한다. 그렇게 고구려의 총공세에 약해질 대로 약해진 수나라군은 거의 궤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며 그 당시 살아나간 수나라군은 2700명에 불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30만의 병사에서 2700명이란 숫자를 생각한다면 그 당시 얼마나 수나라군이 몰렸는지 알 수 있다.
살수대첩 후기
이 당시 고구려는 정말 강한 나라였다.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후 내부 분열과 적 동맹의 공격으로 멸망하게 됐지만 그리스의 스파르타와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이후 수나라군은 재생 불가능한 타격을 입었고 그렇게 2차 고구려와 수나라간의 전쟁은 끝이 난다. 그렇게 수양제는 고구려를 포기하지 않고 이후 계속 3차 4차 공격을 했지만 그는 한 번도 고구려를 함락하지 못한다. 이렇게 고구려는 100만의 병력의 숫자를 만들 수 있는 제국을 망하게 했다는 최강의 나라라고 불린다. 역사책에서는 살수대첩을 간략하게 표현해서 아쉽지만 위대한 전투였던 건 확실하다. 물자의 보급 및 식량 배급이 얼마나 전쟁에서 중요한 지 알려주는 전쟁이었던 거 같다. 을지문덕이 수나라 적진을 관찰할 때 수나라군이 죽여 벼렸다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정말로 궁금하다. 오늘은 살수대첩의 후기를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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